우뚝 선 큰 씨울

by 장동만 posted Jan 21, 200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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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뚝 선 큰 씨울

   “넓고 깊은 진리의 바다, 참새 한 마리는 그 물 한 모금이면 족하니라.”            생 전 함석헌 선생님 말씀이다.
   선생님의 그 넓고 깊은 사상과 신앙, 청년기에 그 아주 작은 단편을 접할 행운이 있었다. 세브란스 회관에서, 서소문 장자 강좌에서, 그리고 천안 씨알 농장에서다.
   비록 한 모금, 한 조각이지만 그 것이 곧장 내 인생의 향방을 가른 선생님의 값진 “말씀’들, 그 중 몇 가지를 내 나름 소화한대로, 극히 어설픈 표현을 빌어 여기에 옮겨 본다.

   # “과일은 익으면 떨어져야”-
  
   우리는 흔히 말한다. 저 사람은 ‘착실한 사람’ ‘착실한 교인’ 이라고.
그런데 이 ‘착실 (着實)’이란 뜻이 무엇인가? 선생님은 풀이 하신다. 과일 (열매)이 아직 설 익었을 때 나무 가지에 찰딱 붙어있는 상태라고.
그러나 과일은 무르익으면 나무 가지에서 떨어진다. 사람도 마찬가지, 어린 아기는 때가 되면 어머니 젖꼭지에서 떨어진다. 그리고 또 때가 되면 혼자서 걷고 혼자 선다 (自立). 즉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의존 (dependent on)치 않고 독립 (independent) 한다.
선생님은 말씀을 이으신다. 신앙도 종교도 마찬가지, 신앙이 무르익으면 교회라는 건물에서, 기도 예배라는 형식에서, 떨어져 나와야 한다고.

# “눈은 보지 말라고, 귀는 듣지 말라고 있다.”-

사람에게 눈은 왜 있나? 물론 보라고 있다. 사람에게 귀는 왜 있나? 물론 들으라고 있다. 그런데 선생님은 말씀 하신다.
“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라고, 귀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말라고 있는 것이니라.”
무슨 뜻인가? 인간은 한갓 짐승이 아니다. 먹고픈대로, 하고픈대로, 멋대로 구는 동물이 아니다. 인간은 도덕적 윤리적 존재다.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,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야 한다. 이 것이 사람이 사람다운 연유다.
선생님은 이렇게 모든 자연 현상에게 조차 윤리성 도덕성을 부여함으로써 향락주의 쾌락주의에 젖은 현대인들을 엄하게 꾸짖고 자제를 촉구 하셨던 것이다.

# “양심에 화살을 꽂으라!”-

선생님은 철저한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, 어떤 부정 어떤 사악의 대상에게도 ‘눈에는 눈’의 대항은 폭력의 악순환만 초래한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다.
어느 땐가 뉴욕 목회자 모임에서 반 군사 독재 투쟁 방법론을 에워싸고 중론이 오갈 때 선생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.
“적의 양심에 화살을 꽂으라! 그 이상의, 그 이하의 방법도 있을 수 없다.”

# “하나님과 직교하라”-

흔히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을 ‘무교회주의’라고 한다. 다분히 잘못 인식된 지칭인데 ‘무교회’의 참 뜻은 무엇인가?
선생님은 신앙의 대상 (하나님)을 ‘인격신’으로 파악 하신다. 또한 ‘나(自我)’를 ‘아무 것도 아닌 존재’가 아니라 어엿한 하나의 ‘인격체’로 보신다.
그렇다면 ‘나’라는 존귀한 하나의 ‘인격체’가 하나님이라는 ‘인격신’과 교류하는데 왜 중간 매체, 또는 중간 역할자가 필요하단 말인가?  ‘나’와 ‘하나님’ 과 직접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?
신학적으로는 많은 논쟁이 되겠지만, 선생님의 이 ‘말씀’이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교회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.

# “사람은 뚫려야~”-

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. “사람은 둟려야 한다”고.
사람의 몸은 식도로부터 항문까지 둟려 있다. 그 중간 어디가 막히면 몸에 이상이 생겨 신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.
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확 뚫려 있어야 한다. 어디가 막혀 있어서는 안된다. 그런 사람을 우리는 ‘꼭 막힌 사람’이라고 하지 않는가.
선생님은 이렇게 속이 확 뚫린 사람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퉁소에 비유, “퉁소 같은 사람”을 거듭 거듭 강조 하셨다.

# “위 나쁘면 위만 생각”-

한국 사람들은 유별나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. 왜 그런가? 선생님의 대답은 “정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”이다.
우리 신체를 볼 때 아무 이상이 없으면 우리는 위가 있는지,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, 아무 의식 없이 지낸다. 그러다가 어디에 이상이 생기면 온 신경 온 관심이 온통 거기로 쏠린다. 위가 나쁜 사람은 뱃속에 위만 있는 것 같이 느낀다.
마찬가지로 정치가 제대로 잘 되어 간다면 사람들이 정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. 요 순 시대에는 백성들이 임금 이름조차 모르고 살지 않았던가.

# “제 정신이면 돌기는 왜 돌아”-

50년 대 춤 바람이 한창 퍼질 때다. 어느날 연단에 서신 선생님, 불호령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.
“모두 정신들이 돌았나?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, 제 정신들이라면 돌기는 왜 돌아?”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<장동만: e-랜서 칼럼니스트>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<중앙일보 및 평화신문 (뉴욕판), 02/24/89일자>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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